과거에는 의료기관 봉직의와 이른바 ‘네트’제 계약을 하면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는 관행이 있었다. 하지만 퇴직금은 반드시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여러 차례 나오며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런데 이후 봉직의와의 사이에서 근로계약서가 아닌 위탁진료계약서를 작성하는 형태의 편법이 등장했다.
위탁진료계약은 단지 명칭만 근로계약을 위탁진료계약으로 바꾼 것이 아니다.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까지도 일반근로계약형태가 아닌 위탁 내지 위임형태로 작성하게 된다. 즉 봉직의를 근로자가 아닌 수탁자 내지 수임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취급해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이 위탁진료계약을 체결한 경우에도 사용자가 봉직의에게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판결이 최근 나왔다.
먼저 판결문에 언급된 위탁진료계약 내용을 살펴보면 ①봉직의는 위탁받은 진료업무를 이행하고 그 대가로 보수받는 내용의 위탁진료계약을 체결했는데 계약서에는 ‘봉직의는 근로자가 아니므로 노동관계법과 관련한 부당한 청구를 하지 않는다’라는 기재가 명백히 돼 있고 ②봉직의에 대한 취업규칙이나 복무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았고 봉직의는 자신의 진료업무수행과 관련해 사용자(해당 사건의 경우에는 생협 대표자)로부터 어떠한 지시나 감독을 받은 사실이 없으며 사용자로서는 봉직의가 진료업무를 적절히 수행하지 않은 경우에 위탁계약에 기한 권리(계약해지·손해배상청구)만 행사할 수 있을 뿐 봉직의를 징계할 수 없었다. ③봉직의에 대한 연차 등 휴가규정은 따로 없었고 봉직의가 휴가로 진료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 봉직의가 직접 대체의사를 구해 진료업무를 대행하게 했다.
추가적인 사실관계를 살펴보면 ①사용자는 과거에 다른 봉직의에게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아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고 ②이후 위탁진료계약 형식으로 봉직의와 계약해 매월 일정 금액의 고정급을 지급했으며 ③ 봉직의는 해당 의원의 유일한 의사로서 근무시간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고 근무장소도 진료실로 특정돼 있었다. ④봉직의는 진료업무수행의 현황 및 실적을 사용자에게 통지해야 했고 봉직의가 보고의무를 해태하거나 불성실하게 할 경우 사용자는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 ⑤각종 의료장비나 사무기기 등은 사용자가 제공한 것이었고 ⑥ 봉직의는 해당 의원을 사업장으로 한 건강보험 가입신고가 돼 있었다.
위 사실관계를 토대로 대법원은 봉직의가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형식적으로 위탁진료계약이라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근로계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대법원이 가장 중요하게 바라본 부분은 봉직의가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장소에서 진료업무를 수행하고 사용자는 고정적인 대가(급여)를 지급했다는 점이다.
해당 의원의 유일한 의사인 봉직의가 평일과 토요일까지 정해진 시간 동안 해당 의원의 진료실에서 진료업무를 하고 현황이나 실적 등을 사용자에게 보고해야 했기에 사용자가 근무시간 및 근무장소를 관리하고 봉직의에게 구체적인 지휘·감독을 했다고 평가했다. 또 사용자는 매월 고정적인 대가를 지급했기 때문에 이는 근로에 대한 대가인 임금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봤다.
위 대법원판결에서 근로계약여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근무시간 및 근무장소 특정여부, 고정대가(임금) 지급여부다. 그런데 일반 의원급 의료기관의 진료형태를 떠올리면 평일 오전·오후와 토요일 오전 정도의 시간 동안 진료실에서 진료업무를 수행하는 것 외에는 다른 형태를 떠올리기 힘들다.
따라서 상시근무하는 의사의 경우 근로관계 외에 위탁 내지 위임관계에 의한 계약관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고 형식이 어떻든 결국 실질적으로는 근로계약에 해당하게 된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