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사 CEO들이 모여 리베이트정황이 의심되는 제약사 명단을 적어냈다. 14일 한국제약협회 이사회에서 진행된 무기명투표 얘기다. 공식적으로 내세운 명목은 ‘불공정거래 사전관리를 위한 설문조사’다.
이날 참석한 이사회 소속 48개 제약사 CEO(대리인 포함)들은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리베이트업체를 1인당 최대 3곳까지 적어 제출했다. 투표결과는 비공개다. 결과는 제약협회 이경호 회장만 열람하며 많이 거론된 회사는 이 회장이 직접 만나 면담한다.
무기명투표가 내부고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잡음과 우려가 끊이지 않았는데도 강행된 이유는 하나다. 리베이트 척결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것. 하지만 무기명투표의 명분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투표에 앞서 조순태 이사장(녹십자 부회장)은 “제약산업은 국가에 많은 기여를 했는데도 불합리한 관행 때문에 리베이트산업으로 매도됐고 어려움을 겪었다”고 언급했다. 검찰, 국세청의 매도와 언론의 지적에서 벗어나 제약산업 스스로 리베이트를 척결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한 끝에 나온 것이 이번 무기명투표라고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매도’ ‘불합리’ 등의 단어를 이번 무기명투표에 적용해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다. 투표방식부터 그렇다. 이번 투표에는 명확한 기준도 근거도 없다. 다만 ‘의심’만 있다. 리베이트산업으로 매도당해 억울하다던 제약사들이 의심만을 근거로 또 다른 리베이트업체 걸러내기에 나선 셈이다.
이사회 상당수가 매출 상위제약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무기명투표는 설득력이 더욱 떨어진다. 리베이트는 산업문제에 앞서 개별회사의 불법관행이 먼저다. 이사회 소속 상위제약사들 역시 불법 리베이트로 문제가 됐던 곳들이 상당수다.
최근 일부 상위제약사들이 CP(공정경쟁자율준수프로그램)를 도입했다고 완전히 깨끗해졌다고 보긴 힘들다. 이제 막 CP전담팀을 꾸리고 윤리경영을 위한 체질개선이 걸음마를 뗐을 뿐이다. 결국 리베이트라는 이름 앞에 어떤 회사도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서 50곳의 이사회가 명확한 근거 없이 200여 제약사의 잘잘못을 따진다는 것은 모순이다. 타깃은 상위제약사보다 중소제약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투표 후 대응방안도 석연찮다. 회원사에 대한 조사권이 없는 제약협회가 설문조사라는 명목으로 리베이트업체를 걸러낸 뒤 협회장과의 면담을 통해 자정활동을 독려하겠다는 방식이 얼마나 실효성을 거둘지 의문이다. 한 제약사의 불법리베이트시스템이 협회장의 개인적인 설득으로 바뀔 수 있는 수준이었던가.
투표가 끝난 후 제약협회 관계자는 “무기명투표는 1회용 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무기명투표가 실제 리베이트 척결에 도움이 됐는지 증명할 방법은 앞으로도 없다. 하지만 쇼가 아니었음은 제약협회가 증명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