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병원 쏠림현상…복지국가의 걸림돌
[참 안 바뀌는 복지정책] 의료전달체계
우리나라 의료서비스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합니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서 실시한 ‘세계 최고 병원’ 평가에도 매년 많은 병원이 이름을 올립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지역의료 편차와 대형병원 쏠림현상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수십년간 꾸준히 문제가 제기돼 온 망가진 의료전달체계가 있습니다. 헬스경향이 기획한 ‘참 안 바뀌는 복지정책’의 이번 주제는 ‘의료전달체계’입니다. <편집자 주>
“자기 자리를 지키세요.” 영화 설국열차에서 틸다 스윈튼이 한 말이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비판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공고한 체계의 중요성도 함께 보여준다.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할 때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데 현 국내 의료전달체계는 제 기능을 상실한 상황이다.
■병원 간 확고한 전원체계 확립 필요
의료전달체계는 의료자원의 효율적 운영을 통해 의료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국민 모두가 적시적소에서 적정진료를 받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른바 ‘병원쇼핑’과 정당한 절차 없이도 상급종합병원 진료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사실상 유명무실화됐다.
2015년 메르스사태 당시 한국-세계보건기구(WHO) 메르스합동평가단은 우리나라의 의료전달체계 및 병원이용문화가 이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에 2016년 1월 복지부를 중심으로 한 ‘의료전달체계 개선협의체’가 출범, 병의원급(1차 의료기관)이 각각 제 역할을 하면서 종합병원(2차 의료기관) 및 대형병원(3차 의료기관)과 협력해 경증은 1차, 중증환자는 3차 의료기관에 전원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협의체가 무색하게도 병·의원은 환자유치를 위해 무한경쟁을 벌였고 대형병원으로 간 경증환자는 1·2차 의료기관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정부는 각 의료기관이 중증도에 맞는 환자를 진료할 때 기관과 환자 모두 이익을 받는 인센티브구조로 개편, 올 1월부터 ‘중증진료체계 강화 시범사업’을 추진 중이다. 또 전문병원제도를 전면 개편해 상급종합병원 수준의 보상을 약속했다.
하지만 ‘진료의뢰서’라는 관문이 남아있다. 3차 의료기관에서 진료받기 위해서는 진료의뢰서가 필요한데 환자가 요구하면 1·2차 의료기관에서는 이를 써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의사가 중증 및 치료가능성을 판단해 3차병원에 보내는 것과 환자 개인의 요청에 따른 전원으로 이원화, 비용을 달리 청구하는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려대안암병원 진단검사의학과 조윤정 교수는 “환자의 요구를 사전에 차단하기란 매우 어렵고 환자가 간호를 위해 인근병원 입원을 희망하는 경우도 있다”며 “다른 OECD국가들처럼 전원체계를 이원화해 중증이 아닌데도 대형병원에서 치료받고 싶다면 돈을 더 내도록 차등을 두는 방법도 하나의 해결책”이라고 설명했다.
■수도권 쏠림현상…해결 여부 미지수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위해서는 ‘수도권병원 쏠림현상’도 개선돼야 한다. 익명을 요구한 빅5병원의 한 교수는 자신이 치료하는 치매환자의 50% 이상이 지방에 거주하고 있다고 밝혔다. 치매는 현재 각 지자체마다 치매안심병원을 두는 등 지역에서의 관리가 가능한데도 그렇다. 치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암 환자 10명 중 3명도 수도권에서 치료받는다.
왜 환자들은 수도권으로 몰리고 있을까. 세브란스병원, 고려대안암병원,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에서 지방환자들을 대상으로 취재한 결과 “수도권 병원이 더 믿을 만하니까”라는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의료자원(인력·병원·장비) ▲의료의 질 ▲진료환경 등 지방과의 의료격차는 날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이다.
정부는 의대정원증원과 지역의사제 도입으로 지역의료격차를 해소하는 한편 권역별 의원-상급병원 협력체계를 구축해 수도권 대형병원으로의 환자쏠림현상을 해소하고 지역의료역량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올 하반기부터 시행되는 ‘지역의료 혁신 시범사업’이 대표적인 예다.
현재 지방의 노인인구비율은 이미 20%가 넘어 초고령사회가 됐다. 지역사회의 의료수요는 폭발하고 있지만 지역 간 의료불평등은 현실이 됐다. 따라서 지역의사제와 같은 장기대책과 함께 당장의 의료불균형을 해결할 단기대책 마련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방의료원연합회 조승연 회장(인천광역시의료원장)은 “지방에 병원이 없다는 것은 지역소멸을 뜻하며 복지국가로 가는 길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라며 “역대 모든 정부가 공공의료 강화를 강조했지만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이지 못한 만큼 하루라도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